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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1) - " 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냐? " / 종려주일 / 이병일 목사 >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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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사순절(6-1) - " 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냐? " / 종려주일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6-03-24 (화) 15:49 1시간전 6  

본문) 요 19:17-22, 계 19:11~16, 삼하 7:1~17


“INRI”라는 죄목이 적힌 명폐가 달려 있습니다. I. N. R. I.는 라틴어 이니셜인데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합니다. 복음서에서 대사제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고소하는 근거로 “하느님을 모독했다”, “성전을 파괴하려 했다”,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스스로 그리스도[메시야]라고 했다” 등등입니다. 그 중에서 네 복음서가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의 왕”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서 나온 터무니없는 누명에 불과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네가 유다인의 왕이냐?”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빌라도와 대사제들의 음모를 폭로합니다. 즉 ‘그것은 너희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나에게 씌운 누명’이라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답할 의사도 이유도 없다는 듯이 그 물음을 묵살하고 침묵합니다. 결국 사형은 언도되고 로마군인들에 의해 예수님은 조롱받습니다. 홍포와 갈대로 나약한 왕처럼 꾸며놓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이 아기였을 때, 극악무도한 학살자 헤롯은 “유대인의 왕”인 자기의 자리를 아기 예수님이 위협한다고 하면서 어린 아기들을 죽였습니다. 헤롯은 이 학살을 통해 자기 왕권이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고 자기의 왕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왕이 되었으며,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평화와 번영을 이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헤롯은 성전 재건이라는 경건한 행동이 하느님이 자신의 왕국에 베푼 은혜에 충실하게 보답하는 영예로운 일이라고 떠벌렸습니다.

심지어 헤롯은 자신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말년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두 아들과 아내를 처형했습니다. 또한 죽기 직전에는 유대의 모든 지역에서 뛰어난 이들을 잡아들여 경기장에 가둬놓게 한 뒤, 자기가 죽을 때 이들을 모조리 죽여 “온 유대와 모든 집안이 좋건 싫건 나를 위해 울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는 헤롯에 의해 폭군의 전형으로 비쳐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INRI를 예수님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INRI가 예수님의 상징이 되려면, 그 의미는 권력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사람 예수의 상징이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자들과 로마의 정치권력자들은 자기들의 지배를 폭로하는 예수님이 눈엣가시 같았는데, 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억지로 덮어씌웠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살았습니까? 예수님의 삶이 왕의 화려한 생활에 비교나 되겠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은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살았던 예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죄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INRI”로 고백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INRI를 예수님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 속에 억울하게 권력에 의하여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렇게 누명을 써서 고통과 죽임을 당한 생명의 권리를 회복하고,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지와 실천 속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사주하는 사람들이 기소한 근거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과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의 딸이라는 말을 해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하느님의 아들’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정치 지배자들에게는 역모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옮겨 놓는) 어린 양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소한 것은 억울한 누명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 헤롯처럼 호화스러운 삶을 누리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죽이고 강제노동을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옳은 일을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갖 고난당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은 의로운 일을 하다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정의의 길입니다. 인민들의 인권과 살림살이가 점점 더 위태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십자가의 길과 정의의 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너무 오래 전에 있었고, 너무 먼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을 은연중에 멀리하려 하고 관념화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고난받고 있는 가까이 있는 예수님을 애써 외면하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예루살렘에서 순례자들이 따라가는 기독교 유적으로만 생각하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찾으려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 가까운 곳에서 고난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먹고 입고 자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당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애쓰다가 예루살렘과 로마의 지배자들에게 잡혀서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님이 가신 길은 의로운 일을 하다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정의의 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20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에서 나온 “유대인의 왕”을 바꾸어 제왕의 모습으로, 승리자의 모습으로 바꾸었습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예수님을 “왕 중의 왕”으로, “만왕의 왕”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느님의 법궤를 자기의 도성으로 옮긴 다윗과 그 왕권을 이어받아 성전을 짓게 될 솔로몬에게 하느님이 하신 약속에 의지하여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라 하였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의로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신실하신 분, 참되신 분”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을 “왕 중의 왕”이라고 하는 계시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로마교황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의 산물입니다. 교황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부각시켰고, 교황 자신은 바로 그 예수님의 대리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예수님은 왕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라는 한정어가 “만왕의”로 대치되면서 기독교는 영광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부르는 것은 또다시 예수님을 음해하는 것이며, 새로운 누명을 씌워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중의 왕”으로 부르게 하면서 자기 스스로 그 왕의 반열에 끼어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다고 하는 기독교에서 이러한 일을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도 이러한 일이 없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단지 권력의 획득이나 경제적 부를 얻는 부적으로 전락시키는 것, 예수님의 가르침을 편안한 삶이나 대학 진학을 위한 주문으로 치부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예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누명을 씌우거나 매도하는 것, 또한 권력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사람의 상징인 예수님을 또 다시 죽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일은 언제나 그래야 하겠지만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면서 “온 인류를 섬기고 생명을 나누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힘 있는 자들의 싸움과 음모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군대에서, 비행기 안에서, 감옥에서 절규하다 죽어간 사람들, 지금도 그러한 누명 때문에 명예와 생존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진상이 밝혀지고, 죽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입니다.


예수님에게 씌운 “유대인의 왕”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그 뒤를 따르던 무리는 소리 높여 외칩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는 이를 찬양합니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를 찬양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에서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로, 기쁨과 승리를 표현하는 환호성이며(시편 118:25-26), 구원의 희망을 외치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지역에서 메시아 대망사상에서 나온 말로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처지)에서 구원할 메시아(구세주)를 보내달라는 의미였습니다. 무리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회적 정의, 평등, 평화, 경제적 풍요를 이루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진정한 평화와 구원을 이루는 왕입니다.

권위 있게 보이려면 나귀(Pony)가 아니라 말(Equus)을 타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탔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위 등극식에는 세 가지 공적인 의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권을 대행한다는 뜻으로 기름을 붓고, 뿔나팔을 불어 왕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백성을 섬기는 자임을 의미하는 뜻으로 나귀를 탔습니다. 스가랴 9:9-10절에 따르면 평화의 왕인 메시아는 어린 나귀, 조랑말(Pony)을 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는 전차와 말(Equus)과 활을 없애고 민족들에게 참된 평화를 선포합니다.

스가랴 9장에 묘사된 왕의 성품은 “공의롭고(올바른, 공정한, 의로운), 구원을 베풀고(구원하다, 해방시키다), 온순하다(가난한, 고통당하는, 비천한, 겸손한, 궁핍한)”고 합니다. 백성들을 올바르고 정의롭게 대하고 구원과 해방을 베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가난하고 비천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강조한 섬김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즉위할 때에 어린 나귀를 탄 것은 다른 민족들의 왕처럼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을 섬기면서 하느님을 대신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그런 적은 거의 없으며,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은 힘으로 백성들의 것을 빼앗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군으로 떠받드는 다윗과 솔로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섬김을 망각한 통치자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통치(나라)는 인간의 힘에 의한 통치로 왜곡되었으며, 백성들의 평화는 힘에 의해 억압된 평화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는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도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고 땅과 군대를 사유화하고 전쟁으로 나라를 확장하여 강한 나라를 만든 다윗의 모습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러한 메시아이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다윗 계통에서 나올 이 메시아는 장차 원수들을 멸망시키고 그의 백성을 고통 가운데 구원해 낼 것이고, 그는 예루살렘 성을 다시 거룩하게 정화시킬 것이며, 힘에 의한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시대와 같은 경제적 풍요, 정치적 평화를 이루는 메시아를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즉 다윗 왕조를 재건할 왕조로서, 이방 민족들을 굴복시키는 군사적 영웅으로서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를 가져오는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무리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에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게 거는 기대와 희망이 있습니다. 당시의 메시아사상은 그들의 구원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기대와 희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외침 속에 있는 구원의 실제는 어떤 것입니까? “이스라엘,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를 이루어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시모나 에레스를 통하여 날마다 기도하는 것처럼 “다윗의 자손들이 속히 번성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속히 다윗의 보좌를 세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 다윗의 나라, 다윗의 자손만입니까?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이루어졌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근간은 야훼 하느님의 섭리를 인간의 역사 안에서 보여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조상들,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를 지향하는 법을 받아서 전해준 모세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법을 어겨서 그 공동체를 파괴하였고, 다윗왕조는 열두 지파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갈라지게 한 정권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메시아사상은 권력쟁탈을 통한 지배자들의 위치이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유대 민중을 지배하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로마 황제에게 아부하여 대제사장으로 임명받아 여전히 백성들을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였습니다.

무리의 함성 속에 있는 구원의 간절함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구원의 내용은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길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정치적 메시아사상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사람의 아들이지 다윗 왕조를 이룩할 다윗의 후손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배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메시아가 아니라 전혀 다른 메시아의 길을 갑니다. 메시아 즉위식이라고 하는 기름부음을 받는 것도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여인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또한 기름부음을 통해서 권력을 쥐고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장례”가 준비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다윗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는 메시아가 되라고 한데 반해, 예수님은 모조품이 가리키는 그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가져오는 메시아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다윗같이 더 많은 정치적 자유와 더 많은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메시아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고, 이에 반해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온전한 생명,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정의, 풍요, 영원 등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가져다주는 메시아가 되려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 곳인 감람산은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 옛 시대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정면으로 맞서는 곳입니다. 그 행진은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을 그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그 중요한 내용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세 번의 수난예고를 통해서 그 길을 제시하였고,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것은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 생명을 섬기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스스로 희생하기 위해서, 내가 대신 죽어 줄 테니 더 이상 죽이지 말고 학살을 멈추라고 항의하기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는 일을 비롯해서 나흘간의 치열한 활동을 하다가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바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정치적 권력에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권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권력을 잡든지 여전히 소외되고, 인권이 침해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길은 권력자를 또 다른 지배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싸움으로 얼룩진 세상을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그들의 싸움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미약하나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은 권력을 쥐고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생명을 살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평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면서 고난주간 첫날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사건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다고 하면서 꿈꾸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결과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함께 걷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죽임당할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행진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일하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오늘 예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바로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바로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항상 기도하며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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