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 6:1~15, 요일 3:11~24, 요 13:31~35
2024년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관심과 찬사를 받으며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작가 한강일 것입니다. 한강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가슴이 서늘해질 만한 말을 합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는 20대 시절에 이런 질문을 했더랍니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쓸 무렵 즈음에 질문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를 추측해 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간 안에서 작동하는 정치-사회적 흐름에 대한 질문이자, 정치-사회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와 공공성에 대한 질문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하면 우리는 신앙의 역사 안에서 “충분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한 번 더 합시다. 우리는 과거의 예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오늘날의 나를, 오늘의 세상을 돕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의 세상과 내일을 살아갈 사람을 구원할 그 무엇이 지금도 미래에게 전달되고 있습니까?
요한일서 3장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것이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나아가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였습니다. 인류 최초의 형제사이에서 살인이 행해졌습니다. 미움은 상대를 살해하고, 사랑은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게 하고 또 절제할 수 있게 합니다. 가인을 아담의 후손이라며 육의 사람이라거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영의 사람이라고 굳이 구별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가인도 예수도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숨결을 받은 생명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선언하셨던 당신의 계획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지금의 사람들과 상호계약으로 갱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누구라도, 언제 어디에서든,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종으로 살던 때에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인도해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며 경외하며 섬겨라. 오직 그 이름만이 변함없는 보증이다.> 이 계약은 지금의 사람들을 넘어 미래의 세대들과도 맺는 계약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온 이스라엘 민족이 복을 받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고 크게 번성하려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열 가지 계명은 각각의 한 사람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숨결을 받은 각각의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평화를 유지하도록 각 사람은 계명에 따라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민족의 조상에게 주신다고 선언하셨던 그 땅에서 정착자로서 안정된 삶을 살도록 하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 계명입니다. 이 열 가지 계명을 실천함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지금과 미래를 살아갈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고민에 빠집니다.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과 현실적인 요구가 부딪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입니다. 선택되지 못한 그 하나는 자연스럽게 포기당합니다. 계명과 현실 중 선택해야 하는 우리는 생존과 생명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사람 유다의 생각과 판단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가룟 유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그리고 유다가 자기의 선택에 따라 방을 나간 후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 이제 시간이 조금 지나면 죽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영광을 얻었다’라고 과거의 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것처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제자들의 사랑은 앞으로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일과 사랑에 대해서는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를 말씀하시고 우리의 일과 사랑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담아서 말씀하십니다. 지금입니다. 지금이 지나간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의 경계입니다. 그 경계가 희미하면 과거와 미래가 뒤엉켜 혼란스러운 중에 지금이 사라집니다. 동시에 미래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을 하는 지금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생명과 죽음, 영과 육을 결정하는 아주 여린, 그러나 명확한 경계가 되어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광야에서 열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은 이 말씀이 실현되는 현장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누구인지를 구별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진실함 없이는 도무지 행동할 수 없는 죽음으로 실천되었습니다. 요한 장로는 권면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계명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회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꼭 지키도록 요구되는 규정>이라고 합니다. 십계명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사람들에게 꼭 지키도록 요구하는 규정이 담긴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하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이 딸려 있습니다.
그 옛날 생활의 터전인 땅을 마련해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절박함과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절박함의 형태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느끼는 무게는 경중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너와 나의 삶의 무게는 분명 다를 것이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내 것으로 경험하기는 그래서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전에 살았던 이들이 떠안고 있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을 사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는 광야의 백성은 이미 오래 전 조상들과 했던 약속을 지금에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요구에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계약의 보증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므로 생명은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그에 더하여 생존에 필요한 안정과 풍요가 약속된 대로 따라옵니다.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요구에 미래를 맡기는 믿음의 조건은 내가 직접 듣지도 못했던 약속이 전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광야를 떠도는 우리가 조상들과 맺었던 하나님의 선언에 따라 만나를 공급받는 은혜를 누리고 있으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태어나는 자손들도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사랑받은 사람들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지금 나의 사랑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을지라도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는 주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여 우리의 미래를 열어놓읍시다. 주께서 이루시는 사랑을 누리며 그 사랑을 우리의 이웃들과 후손들에게 전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전에 있었던 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지금도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인이 일으켰던 살인의 현장에, 당신의 피를 뿌리심으로 치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지치고 상한 심령과 육체를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랑의 실천에 참여하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