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62장 1-7절, 로마서 11장 13-24절, 마가복음 1장 1-11절
오직 너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결혼한 여인’이라고 부를 것이니.(이사야 62장 4절)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마가복음 1장 11절)
아직도 넌 혼잔 거니 물어오네요 / 난 그저 웃어요 / 사랑하고 있죠 /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 건가 봐 / 좋은 사람 있다면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 그댄 모르죠 /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 너무 소중해 꼭 숨겨 두었죠 /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 내 눈에만 보여요 /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 둘 거야 /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 그 사람 그대라는 걸 /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 욕심나지 않아요 /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맨발의 디바 가수 이은미가 부른 ‘애인 있어요’라는 노래의 가사지요. 아시는 대로 이은미는 화려한 무대에서만 노래하는 게 아니라, 혹독한 겨울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노래하고, 참사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는, 그런 가수지요. 그녀가 부른 절절한 사랑의 노래는 외롭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뜨거운 눈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 ‘애인 있어요’라는 노래는 그녀의 대표곡입니다. 나는 혼자인 것 같지만, 그러나 내게도 애인이 있다고, 너무 소중해서 내 마음속 깊숙이 숨겨 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니 나를 너무 안쓰러워하지 말라고, 절절하게 고백하는 사랑 노래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외롭고 힘들 때, 그때 혼자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더 고통스럽고 힘겨울까요. 그렇지만 그때 문득 떠올릴 수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힘이 좀 나고 견딜 만하겠지요. 그 사람 생각에 시린 마음이 시나브로 따뜻해지는, 그런 사람을 마음에 품고 살 수 있다는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나는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살맛 나고 얼마나 든든할까요?
오늘 우리는 새해 첫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는 분, 우리를 좋아하는 분이 계신다는 말씀을 새해 첫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이사야 62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헵시바)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결혼한 여인’(쁄라)이라고 부를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이게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애인이라는 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애인이라 부르실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애인’을 넘어서 ‘결혼한 아내’라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애인이 있습니다. 올 한 해를 살아가는 모든 날 모든 곳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기억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이 말씀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고 새 이름으로 불러주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은 그들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4절 앞부분을 보면, “다시는 어느 누구도 너를 두고 ‘버림받은 자’(아주바)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너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셰마마)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너나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림받은 자’ ‘소박데기’라고 부르며 천덕꾸러기로 멸시하고 조롱했다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라는 망하고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무너지고, 낯선 땅에 포로로 끌려와서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은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저들이 보기에만 그런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들의 형편과 처지는 ‘지렁이’와 같았고, ‘벌레’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멸시받고 학대당하는 이스라엘,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절망하고 자조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새해의 태양이 밝게 떠오르듯, 시온의 의가 해처럼 빛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렇게 되기까지 쉬지 않으시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그 약속을 반드시 속히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하고 다짐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애인’이라는 새 이름, 참으로 놀랍고 가슴 벅찬 이름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이름이며, 또한 새해를 맞은 우리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오늘 또 새해 첫 복음서의 말씀으로 마가복음의 첫 장을 열었습니다. 마가복음을 여는 첫 단어는 ‘아르케’라는 그리스말입니다. 아르케! ‘시작’, ‘처음’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가 ‘태초’라는 말로 시작했듯이, 마가복음도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마가복음의 첫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지요. 그런데 이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길을 닦는 예언자였습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하는 것’이 그가 받은 소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실 인자의 길,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의 세례는 무엇일까요? 요한의 세례는 무엇보다 ‘근원적인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지요. 사람들은 그에게 나아와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사죄, 속죄의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이 ‘속죄’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서 속죄는 모든 의례의 핵심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어떻게 했을까요? 사람들은 속죄받기 위해 희생제물을 사서 신전으로 갔습니다. 신전에 있는 제사장들은 그 제물을 받고 속죄 제사를 드렸지요. 그렇게 신전에 제사장을 통해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이어 성전에서 속죄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성전이 아니라 광야로 나갔습니다. 제사장의 예복이 아니라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정결한 음식이 아니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지요. 무엇보다 그는 장엄한 속죄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요단강 강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단강 강물은 그 무슨 영험한 聖水가 아니지요. 그냥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흐르는 물입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제물도 없이, 공짜로 속죄하는 요한의 세례, 이게 무엇입니까? 근원적인 종교개혁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면죄부, 곧 돈으로 속죄를 팔아먹는 상업 종교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지요.
예수님은 이 ‘개혁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여기서 우리에게 진정한 세례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물로 주는 세례를 넘어서는 진정한 세례, 곧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자신의 세례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실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 했지요. 예수님의 세례는 바로 그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서 막 올라오실 때,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은 그때 하늘이 갈라지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이고, 또한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세례입니다. 세례는 그저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의례가 아닙니다. 그저 머리에 물 한 방울 적시는 것으로 끝나면,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정한 세례는 하늘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땅만 바라보며 살던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며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것만 탐하며 집착하던 삶으로부터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총으로 사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의 거친 숨을 헐떡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에게 불어넣어 주셨던 그 생명의 숨,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으로 숨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이 놀랍고 신비로운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나님의 子女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始作하는 것입니다.
요즘 의학계의, 연구에서 사람의 마음과 몸은 긴밀하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답니다. 흥미로운 일이지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 몸이 반응하고 그 건강 상태도 현저하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그냥 추측이 아니라 실제 실험에서 나타나는 생물학적 반응으로 증명된답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좋은 생각을 하면 우리 몸에서도 좋은 호르몬이 나오고, 그 호르몬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고 우리 몸을 든든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하고 마땅한, 그러나 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꽉 차면 배도 덜 고프지만, 마음이 허하면 아귀처럼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사야는 바빌론의 포로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버림받았다고, 우리는 지렁이요 벌레라고 절망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아니라고, 우리는 버림받은 소박데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하나님의 연인이라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반드시 속히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시고 구원을 이루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사야 62장 6절 하반절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드려야 한다.” 무슨 얘기일까요? 하나님이 무슨 건망증이나 초기 치매라도 있어서 깜박깜박하신다는 얘기일까요? 아니지요. 하나님께 늘 상기시켜드려야 한다, 이 말은 역설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은 누굽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지 말고 하나님께 늘 상기시켜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고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애인이라는 이 사실을 망각하지 말자, 그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늘 상기하며 살아야 우리가 비루한 맘몬의 좀비가 아니라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들었던 하늘의 소리를,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운 마음으로 함께 들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정말 우리가 감히 받들 수 없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음성을,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우리가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놀라운 비밀은 다만 ‘겸손함으로, 그리고 두려움으로’(롬 11장 20절) 받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 간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의 모든 날 모든 곳에서, 우리가 사는 모든 날 동안 이 음성을 잊지 말고 늘 상기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하늘을 활짝 열어주시고, 이 땅에 평화의 성령을 비둘기같이 내려주셔서, 우리도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