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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4-1) - " 공의로 지으시고, 긍휼로 부르시며, 영광으로 오시는 하나님 " / 김유준 목사

관리자 2026-09-24 (목) 11:59 46분전 3  

본문) 욥37:14-24 · 마24:22-34 · 롬9:14-26


Ⅰ.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고마비의 계절에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음이 잠시 넓어집니다. 우리가 염려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계절은 바뀌고, 햇빛은 곡식을 익히며, 땅은 생명을 길러냅니다. 창조절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마음을 멈추고,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하늘 아래 우리의 삶이 늘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취업의 문턱에서 거듭 좌절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성실하게 일해도 빚과 주거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마음으로는 묻고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제 삶을 보고 계십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견뎌야 합니까?”


오늘 세 본문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욥기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창조주 앞에 세웁니다. 로마서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음을 증언합니다. 마태복음은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모으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세 본문을 관통하는 소망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긍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삶을 맡기고, 이웃을 사랑할 용기를 얻습니다.


Ⅱ. 창조주를 경외함은 그분의 공의를 신뢰하며 우리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욥기 37장 14절은 말씀합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여기서 “서라”는 히브리어 ‘아모드’(עֲמֹד)이고, “깨달으라”는 ‘히트보넨’(הִתְבּוֹנֵן)입니다. 멈추어 서서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입니다. ‘오묘한 일’인 ‘니플레오트’(נִפְלְא֬וֹת)는 인간의 이해와 능력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들을 가리킵니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지식이 완전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눈앞의 한 부분을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까지 아십니다.


15절부터 18절까지 엘리후는 번개와 구름, 남풍과 하늘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그대가 아느냐?” “그대가 할 수 있겠느냐?” 하늘을 녹여 만든 거울처럼 묘사한 것은 고대의 시적 표현입니다. 인간이 지어내지 않았고 마음대로 붙들어 둘 수도 없는 세계의 장엄함을 보여줍니다. 19절부터 22절에서는 말과 시야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눈부신 빛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엘리후의 변증 이후, 하나님은 마침내 욥을 만나 주시고 그의 말을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서라”는 말씀 앞에서 먼저 멈추어야 할 것은 타인의 고통을 다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성급한 판단입니다. 아픈 이에게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그 곁에 앉아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는 우리가 답을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기도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욥은 모든 고난의 이유를 설명받은 뒤에야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설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새롭게 알게 됩니다.


이 신뢰를 붙드는 말씀이 23절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입니다. ‘미쉬파트’(מִשְׁפָּט)는 “정의와 공정한 판단”을, ‘체다카’(צְדָקָה)는 “마음을 같이 하는 의로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크신 능력으로 다스리시되, 그 능력을 의로우신 성품과 어긋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불의한 현실까지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분은 공의를 굽히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면서, 그 믿음이 성도에게 위로를 주고 맡겨진 책임을 부지런히 감당하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사랑과 돌봄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믿음으로 오늘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경외하는 사람은 피조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땅도, 이웃도, 나 자신도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재난을 당한 이웃에게 죄의 이유를 묻기 전에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삶에 지친 사람에게 더 견디라고 말하기 전에 쉴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돌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연약한 생명을 지키는 일이 우리의 예배와 이어져야 합니다. 창조주 앞에서 겸손히 선 사람은 이웃 위에 군림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은혜로 살아가는 피조물임을 알기에, 다른 사람 곁에 설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두 번째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Ⅲ.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자랑을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경계를 넓힙니다.


로마서 9장 14절에서 바울은 묻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리고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욥기에서 고백한 하나님의 공의가 여기에서도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9장은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무심하게 분류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품고 하나님의 약속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15절은 출애굽기 33장 19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그 배경에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배반이 있습니다. 백성이 언약에 충실했기 때문에 다시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셨기에 관계가 이어지고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16절은 구원이 원하는 자나 달음박질하는 자에게서 비롯되지 않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깊은 쉼을 줍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성적으로, 성장해서는 직장과 소득으로 자신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 습관을 신앙에도 가져와, 더 많이 이루고 더 잘 봉사해야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새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낙심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말씀을 붙드십시오. 여러분의 실패가 하나님의 긍휼보다 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그리스도께 돌아갈 은혜의 길은 열려 있습니다. 회개는 사랑받을 자격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죄와 억압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17절과 18절에서 바울은 바로와 완악하게 하심을 말합니다. 출애굽기는 바로의 거듭된 저항과 하나님의 심판을 함께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성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억압자의 힘도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끝내 좌절시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19절부터 21절의 토기장이 비유도 같은 경외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심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인간의 권력이 빌려 써서 약한 이들의 질문을 억눌러서도 안 됩니다. 토기장이는 하나님이시며, 권력을 가진 사람도 우리와 같은 진흙입니다. 이 비유는 누군가를 천한 신분으로 묶어 둘 허가증이 아닙니다.


22절과 23절에는 진노와 심판만 아니라 ‘오래 참으심’이 함께 나옵니다. 헬라어 ‘마크로튀미아’(μακροθυμία)입니다. ‘멸하기로 준비된’이라는 표현에는 준비한 주체가 명시되지 않지만, 영광을 위하여 미리 예비하신 분은 하나님으로 제시됩니다. 이 문법적 차이만으로 예정의 신비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의 풍성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어 호세아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던 말씀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자리에 놓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넓어집니다. 혈통이나 공로로 세운 담장 밖에 있던 사람도 하나님의 부르심 안으로 들어옵니다. 교회는 이 은혜로 태어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기에, 낯선 이웃에게도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 교회에 왔을 때, 우리는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부터 묻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친 마음으로 찾아온 사람에게 더 필요한 것은 이런 말일 수 있습니다. “오셔서 반갑습니다. 함께 식사하실까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결과를 내놓지 않아도 환영받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이 사정을 숨기지 않아도 존중받으며, 이주민이 손님으로만 머물지 않고 함께 책임지는 가족이 되는 교회. 긍휼의 그릇이라는 이름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Ⅳ.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그분의 공의와 긍휼을 살아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환난과 미혹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22절에서 먼저 들려오는 것은 고난에 한계를 두시는 은혜입니다.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각 사람의 고난이 언제 끝날지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 끝없이 자기 백성을 삼킬 수 없다는 소망을 얻습니다. 주님은 이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십니다. 불안할수록 사람은 강한 확신을 말하는 지도자에게 기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큰 표적과 놀라운 능력이 그 자체로 진리의 보증은 아닙니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회개와 사랑에 이르게 하는지, 아니면 두려움을 이용하여 특정 인물에게 매이게 하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27절의 “임함”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곧 도래를 뜻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동편에서 서편까지 비치는 번개에 비유됩니다. 누구만 아는 골방의 비밀로 숨겨 둘 사건이 아닙니다. 28절의 주검과 독수리 이미지는 문맥에서 심판의 명백함과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주님의 오심에는 악을 심판하시는 엄중함이 있습니다.


29절의 해와 달과 별의 흔들림은 구약 예언자들의 심판 언어를 이어받습니다. 30절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인자는 다니엘 7장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 영원한 권세와 나라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질서가 흔들려도 역사의 마지막 통치권은 폭력과 탐욕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욥기의 구름과 마태복음의 구름을 함께 묵상할 때 우리는 창조와 완성을 한 시야에 담게 됩니다. 욥기의 자연 묘사가 곧바로 재림의 예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창조세계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통해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 헤아리지 못하는 삶도 그분의 마지막 말씀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향한 약속 가운데 31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방에서 자기 백성을 모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잊힌 것처럼 살아온 이들도 주님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며 흘린 눈물, 사랑하려고 애쓰다 겪은 아픔도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오시는 분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재림은 성도에게 두려움만 아니라, 마침내 주님을 뵈리라는 소망입니다.


32절부터 34절의 무화과나무와 “이 세대”에 관한 말씀은 깨어 기다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의 심판과 최종적인 재림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특정 연도나 현대 사건에 성급히 맞추지 않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36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과 때를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가까우심은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사랑을 미루지 말라는 부름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며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창조주의 공의와 하나님의 긍휼은 희년의 복음과 만납니다. 오늘 세 본문이 직접 희년법을 설명하지는 않지만, 레위기 25장은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밝히며 잃었던 기업의 회복과 종이 된 이들의 자유를 명합니다. 신명기 15장의 안식년은 채무 면제를 명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전하는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에는 가난과 실패가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영원한 운명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땅과 재산을 소유한 사람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빚지고 밀려난 사람도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이웃입니다. 희년의 정신은 모든 현대 제도의 답을 곧바로 제공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경제생활과 사회질서가 누구에게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 주는지 묻게 합니다. 개인의 회개와 죄 사함은 이 복음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은혜로 이웃과의 관계도 새롭게 배웁니다. 우리의 돈과 노동, 소유와 권한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사회적 책임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Ⅴ. 나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먼저 한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자리에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혼자 식사하는 청년에게 식탁을 내어 주고, 채무와 주거 문제로 지친 가정의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도움받을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봅시다. 이러한 돌봄이 잠깐의 감동에 그치지 않도록 교회의 예산과 시간을 꾸준히 내어놓읍시다. 일터와 지역사회에서도 정당한 임금과 안전, 쉼을 존중하고, 취약한 이들의 목소리가 제도에 반영되도록 힘씁시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 붙들린 우리가 이웃의 손을 붙드는 일입니다. 도움받는 사람이 신앙을 가져야만 지원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붙이지 맙시다. 긍휼은 우리 자신의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오늘 할 수 있는 사랑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으며, 그 나라의 공의와 긍휼을 지금 증언합니다. 


오늘 마음이 지친 분은 마음을 내려놓으시고, 모든 짐을 혼자 붙들려던 손을 잠시 펴십시오. 공의로운 창조주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그 은혜로 다시 힘을 얻은 우리는 곁에 있는 이웃을 향해 손을 내밉시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긍휼로 붙드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오십니다. 이 믿음과 소망 안에서, 오늘도 사랑하며 희년의 기쁜 소식을 살아내는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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