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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8-2) - "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4-10-17 (목) 16:59 26일전 102  

본문) 출 20:1~21, 빌 4:8~9, 막 12:28~34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마가복음 12장 34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누가복음 10장 28절)


어떤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다가 물러날 때가 되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지요. 무슨 일이 가장 중요할까요? 왕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한데 모아 잘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지혜 백서’입니다. 그게 있으면 다음 왕도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고, 또 백성들도 잘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왕은 나라 안에 있는 현자를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현자들은 각자 맡은 분야에 따라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며 치열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지혜를 열두 권의 총서로 집대성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위업이지요. 그런데 ‘지혜 총서’를 받아든 왕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방대한 책을 누가 다 읽을 수 있을까요? 왕은 그것을 한 권으로 집약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열두 권을 요약하려면 머리에 쥐가 나겠지요. 그러나 내로라하는 현자들 아닙니까? 그 많은 걸 한 권으로 요약했습니다. 왕은 그 책을 보고는 더 욕심이 생겼습니다. 먹고살기 버거운 백성들에게는 한 권도 부담스러우니까, 단 한 마디로 콕 짚어주면 좋지 않을까요? 왕은 다시 그걸 한 마디로 줄이라고 지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현자들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밤을 새우고 또 새워서 그 책을 마침내 한 마디로 줄였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세상의 모든 지혜를 줄이고 또 줄여서 농축한 그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현자들의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공짜는 없다!”


공짜는 없다.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은 말이랍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공짜는 없다는 이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이 그리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짜를 탐하는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어지럽습니까. 우리가 공짜라고 생각하고 마구 파괴한 자연이 지금 우리에게 엄청난 청구서를 보내는 것을 보면, 공짜는 없다는 말은 지혜 중의 지혜를 담은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의 역사에서도, 우리의 자연 생태계에서도 공짜는 없습니다.

그런데, 공짜는 없다는 말이 세상의 지혜를 집약한다면, 우리 기독교의 신앙을 한마디로 집약하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왕의 현자들은 열두 권의 책을 요약했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예순여섯 권의 책이 있습니다. 구약성서 서른아홉 권과 신약성서 스물일곱 권입니다. 이 성서 전체를 한마디 말로 요약한다면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마가복음 본문의 내용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계명, 하나님이 주신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 대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모든 계명을 집약하는 계명은 무엇이냐, 그 말이지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에게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한 문장으로 줄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씀입니다. 모든 계명을 담고 모든 말씀을 집약한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산다면,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 곧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계명, 하나님께서 돌판에 새겨 주신 십계명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출애굽기 본문은 십계명 이야기지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십계명의 전반부에 있는 네 계명은 ‘하나님 사랑’을 말합니다. 먼저 제일 계명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입니다. 이 계명의 바탕에는 히브리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종교 경험이 있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내 얼굴 위에’, 다른 신들(복수)을 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만신전’에는 그야말로 만 명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이제 그런 잡신들을 하나님의 얼굴 앞에 두지 말라, 그런 우상들은 치워버려라, 그 말입니다. 두 번째 계명도 이집트 종교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집트의 신전에는 정말 많은 신의 형상/우상이 있었지요. 그야말로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과 물속에 있는 것들의 온갖 우상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메뚜기 우상도 있고 송아지 우상도 있고 세상 만물의 우상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히브리 사람들을 그 우상들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는 그런 우상들을 치워버리고, 다만, 오직, 하나님의 형상만 만들어 모시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 어떤 우상도, 그 누구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계명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집트의 종교는 자기들이 믿는 신을 섬기면서, 그 우상의 이름을 크게 물렀습니다. 자기들의 신들에게 ‘주여 삼창’도 외치고, 열광하고 발악하며 그 신들의 이름을 불러댔지요. 그들은 신이 자기 이름을 크게 불러주어야 좋아한다고 믿었습니다. 정말 웃기는 일이지요. 엘리야 예언자는 그런 자들에게 너희의 신은 귀가 먹었느냐며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히브리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는 저 우상들의 이름이 아니라 다만,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더 크게 부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아니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무슨 말이겠습니까?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그 어떤 형상/우상도 도무지 만들지 말라, 하나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이게 무슨 계명이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는데, 세상에 이런 계명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에 대한 계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들여다보면, 여기에 보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마음입니까? 긍휼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지요. 아버지의 마음이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머니 집에 들르면, 어머니께서 늘, 꼭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가서 좀 쉬어!’ 제가 돕겠다며 뭐 설거지라도 좀 하려 하면 또, ‘그거 하지 말고 내버려 둬!’ 하셨지요. 이 어머니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이 부모의 가슴 짠한 마음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온갖 신들을 섬기느라 그야말로 진이 빠지고 뼈가 바수어져야 했습니다. 그 엄청난 거대한 신전을 누가 지었습니까? 그 장엄한 형상들은 또 누가 깎고 다듬고 문질렀을까요? 그 신들이 나타나면, 그 신들의 아들이라는 파라오가 행차하면, 누가 목청이 터지도록 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질러대야 했을까요? 히브리 사람들 아닙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그 신전을 짓느라 뼛골이 빠지고, 그 신상을 다듬느라 손발이 문드러지고, 땅바닥에 엎드려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느라 목이 다 쉬었습니다. 그런데 그 히브리 노예들을 하나님께서 해방하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에게 다시 저 우상을 섬기지 말고 이제는 나만 섬기고, 내 형상만 만들고, 내 이름만 불러대라고 하셨을까요? 그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 신들의 노예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노예로 소유권 이전이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여전히 숙명적인 노예일까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이제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고통스러운 노예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그 노예처럼 굴종하는 습성도 치워버려라, 그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얼마나 아팠는지 잘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제는 좀 편히 쉬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처럼, ‘이제 좀 들어가 쉬어’ ‘그거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 안쓰럽게 안타깝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계명들은 계명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아버지의 긍휼한 마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신 게 아니라, 쉬라고 노래하셨지요. 그런데 제 어머니만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네 번째 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지켜라, 그것도 거룩하게!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쉬랍니다. 설거지도 하지 말고, 뭐 하나님 위한답시고 눈치도 보지 말고,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쉬고, 너희 아들딸도 쉬고, 너희 종들도 너희 집짐승도 쉬고, 너희 집에 든 나그네도 모두 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그 어떤 신이 자기 신도들에게 쉬라는 계명을 준 적이 있을까요? 이거 쉼에 걸신들린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계명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계명입니까? 이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 애타는 마음을 보지 못한다면, 그 애끓는 사랑을 볼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신앙이란 말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편히 쉬기를 바라십니다. 그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십계명에서 긍휼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 사람을 위해 주신 후반부의 계명들도 대낮처럼 환하게 보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서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까지 그 모든 계명의 바탕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절절히 배여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계명의 알짬이며 으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사람들을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에서 해방하셔서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계명/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을 집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었지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계명의 알짬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의 질문에 으뜸이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계명과 말씀의 핵심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톺아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율법학자는 가장 으뜸 되는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되물으셨지요. 그러자 율법학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대번에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학자인데, 전문가인데, 어떻게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학자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오늘 우리 모든 기독교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도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요? 그렇습니다. 아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게 문제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눅 10:28) 이웃이 누구냐는 율법학자에게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눅 10:37) 그렇습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알짬을 잘 알고 있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무슨 말입니까?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는 않지만, 그러나 아직 그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가 아는 그것을 실천할 때, 그는 그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입니다.”(빌 4: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배우고 받고 본 것, 그래서 우리가 아는 그것을 우리가 실천할 때,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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