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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8-1) - " 개혁하는 교회 " / 종교개혁주일 - 이단경계주일

관리자 2025-10-23 (목) 13:55 6시간전 16  

삼상 8:1-22; 롬 7:5-13; 마 11:16-24 


 

교우 여러분, 안녕하세요? 함께 예배드리는 이 공동체 위에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1. 개혁들(Reformations)


오늘은 창조절 여덟째주일이며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8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성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난 당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나 부패나 타락 행태를 고발하는 95개조 논제를 독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내걸어 개혁의 깃발을 삼았던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물론 루터는 중요한 개혁의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를 유일한 개혁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루터 이전 중세 후기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고 신앙의 본질 회복을 주장한 개혁자 요한 후스(Jan Hus, 1369–1415)도 있었습니다. 체코 프라하 구시장 광장에 가면 그의 희생 5백년을 기념하며 세워진 후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동상에는 “서로 사랑하라,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바라라.”라는 말이 쓰여져 있는데, 후스가 화형당하면서 남긴 말입니다.

또한 루터 이후에도 많은 개혁자들이 있습니다. 울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스위스)는 “교회와 신앙의 모든 규범은 오직 성경에서만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성서에 없는 것들, 예를 들면 미사, 성상을 철폐하고 단순한 예배를 드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 프랑스/스위스 제네바)은 츠빙글리의 “성경 중심”과 “공동체 윤리”를 계승하면서 체계적 신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칼뱅의 제자가 되어 스코틀랜드 귀국 후 개혁을 추진하였고, 스코틀랜드 장로교(Presbyterian Church)의 창립과 영국 개혁교회 발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잉글랜드의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는 국가 주권 하의 교회와 전례를 개혁하여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 지금의 성공회 창설을 주도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16세기 재세례파(Anabaptists) 운동에서 비롯된 비폭력·공동체적 신앙 전통을 지닌 개신교 교파인 메노나이트파(Mennonites)가 나왔는데,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가 “신앙은 단지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정신을 강조한 가르침으로, 훗날 퀘이커와 평화운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종교개혁기념공원(Reformation Wall, Monument de la Réformation)도 있습니다. 거기에도 많은 개혁자들의 동상과 부조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단 한 사람 또는 단 한 차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내적 개혁(Catholic Reformation) 또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이라 불리는 대규모 개혁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 트리엔트 공의회, 예수회 운동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가톨릭 내부에서 부패를 바로잡고,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저지하며, 신앙과 교육, 예술의 쇄신을 통해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그래서 우리 역사에는 단 한 사람의, 단 한 번의 ‘개혁’(the Reformation)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혁들’(Reformations)이 있었다, 종교개혁이 아니라 종교개혁 운동이다. 이런 말씀이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함께 나누고 싶은 첫 번째 강조점입니다. 


2. 개혁은 사건이며 동시에 과정


두 번째 드릴 말씀은 개혁은 사건이며 동시에 과정이라는 말씀입니다. 칼뱅 신학의 정신을 계승한 후대 신학자들은 “이미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라는 표어를 제시했습니다. 종교개혁 정신(루터·칼빈 등)을 15-16세기라는 일정 시점의 사건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 과정으로 이해하자는 의미입니다. 개혁된 교회라 하더라도 완성된 공동체는 아니라는 자각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즉 성서를 기준으로 시대마다 자신을 성찰하고 갱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사회의 개혁


세 번째 강조하고자 하는 말씀은 교회의 개혁과 사회의 개혁이 서로 맞물려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15세기 이후 종교개혁은 사회 개혁으로 이어집니다. 

종교개혁의 영향은 정말 컸습니다. 이제 교황이 진리의 최종 권위가 아니고 성서와 양심이 진리의 근거가 됩니다. 신앙은 교회의 중재를 통해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든 개인의 직접적 책임이 됩니다. 그전까지 하나님이 교황이나 왕에게 교회와 국가를 다스릴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고 하던 가르침은 이제 무너집니다. 이런 변화는 교회 밖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종교개혁운동은 영국의 권리장전(1689), 미국의 독립선언(1776), 프랑스대혁명(1789) 등이 이어졌습니다. 즉 종교개혁을 넘어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4. 지금 개혁하는 교회


오늘 구약성서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몰려가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삼싱 8:5b)라고 요구합니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면, 그가 너희를 수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우리에게도 왕이 필요하다며 사무엘에게 조릅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에 대한 사회의 손가락질이 따갑습니다. 교회를 개인적인 축복을 보장하는 통로처럼 선전하고 사회의 온갖 불의에 눈감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은 더 많은 탐욕 추구를 위해서 수단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뇌물을 받더라도 그 가운데 십일조를 바치면 무사통과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어도 회개함 없이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며 떵떵거립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과 계명은 우리의 탐욕과 죄된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맞습니다. 율법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지구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제도들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제도를 따르면 만사형통할 것처럼 착각합니다. 중세기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1519) 수도사는 “상자 안에서 돈이 쨍그랑거리면 영혼이 불에서 뛰어내린다” 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면벌부를 팔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교계 일부에서는 목사라는 사람이 중세시대 교황이 떨친 권위처럼 “○○○ 후보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겠다”고 큰소리 칩니다. 나아가 “하나님 꼼짝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 망언을 늘어 놓습니다.


개혁자들이 지금 이 자리에 오면, 그래 여러분이 정말 개혁교회의 상속자들이라며 칭찬하겠습니까? 이미 개혁된 교회? 아닙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아가 하나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며 욕보이는 모습, 바로 이 자리가 개혁이 절실한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처럼 일부 교회가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고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렸다고 비판하면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 전혀 뚱딴지같은 대응을 합니다. 신앙의 본질 문제를 지적하면, 논점을 바꿔치기하여 성서의 지엽적인 표현들을 들어 그것이 본질인 것처럼 왜곡, 선전하고 교회 갱신 요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산업혁명 초기, 예수님의 수난일인 금요일에는 금식하거나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동노동이나 노동착취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일부에서는 낙태만 하지 않으면 진정한 신앙인이라 취급받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주초’ 문제만 피하면 좋은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동성애 반대, CCP 반대가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주셨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여기서 나아가 “따라서 양성평등이 맞고 성평등은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창세기의 말씀이 의학적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XX, 또는 XY 성염색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까? 여성으로 보이지만 X염색체 하나만 존재하는 터너 증후군(Turner syndrome), 남성으로 보이지만 XXY 염색체로 나타나는 클라인펠터 증후(Klinefelter syndrome), 이외에도 등등 많은 변이가 나타납니다. 이외에도 XXYY, XXXY, XXXXY, XXX, XXXX< XXXXX 등등 많은 변이가 나타납니다. 그럼 과연 이들, 전세계 약 1.7%라고 추정되는 간성인(intersex)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다양성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창조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개혁 도상에 있는 교회’여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종교개혁기념주일은 과거의 사건, 개혁의 역사를 기억하는 동시에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의 갱신, 개혁의 과제를 마음속에 새기며 실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개혁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는 교회가 교회를 또한 사회를 개혁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총회가 정한 이단경계주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이단으로부터 교회가 공격당하는 지경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더 이상 교회가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단의 극복은 교세 싸움을 통해 결판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585장, 루터의 찬송입니다.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고 들끓는, 위세를 떨치는 이단 사이비들을 앞에서 우리는 “진리가 승리하리라” 외치며 나가야 합니다. 


율법 조문 몇 개가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신봉했던 예수님 또는 바울 당시의 유대교나, 짤랑하는 동전 몇 푼이 구원을 보장해 준다고 소리를 높였던 루터 당시 로마 가톨릭, 그리고 차별과 혐오에 동참하면 좋은 신앙인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오늘날의 교권세력을 극복하는 일이 바로 오늘 이 땅에서 ‘개혁하는 교회’의 과제여야 합니다. 


나아가 한국 사회가 또 지구 곳곳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공감과 연대,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도록 애쓰는 우리 진정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19b) 우리 신앙인들이 개혁하는 교회를 통해 드러내야 하는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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