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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 만우 송창근 기념사업회 총회 설교

관리자 2018-03-08 (목) 12:45 6년전 1645  

본문) 창13:8-9. 마11:2-6, 엡2:14-20 

제목) “ 그리스도를 본받아 ”

                                                                                                                                                                              최부옥 목사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뵙지 못한 만우 송창근 목사님을 기리는 모임을 갖고 있다. 다행히 그를 뵙고 기억하는 선배 몇 분들의 소중한 추억담과 무엇보다도 그 분이 남긴 소중한 글들이 우리가 그를 접근하는 데에 큰 도움이 주고 있을 뿐이다. 

 

나 역시 송 목사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분에 대하여 들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만약 그 분이 납북(拉北)되지 아니하고 살아계셨더라면, 그래서 우리 교단이나 교계의 지도자로 계속 계셨다라면-, 아마도 지금처럼 우리 교단이 왜소해 있거나 장로교도 이렇게 분열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란 말들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 분의 역할과 존재의 가치가 높고 크셨음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부재로 인하여 겪게 된 제자 된 우리의 허약해진 모습에 대한 탄식(歎息)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송 목사님이 우리의 기억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계속 남아 있어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계신 분이실까? 그것은 그 분의 높은 학문과 지성의 단순한 흔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그 분이 품고 있던 덕성과 지도자로서의 높은 인격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도 그 분은 남달리 인물을 보는 탁견이 있었고, 그 인물을 키워내고 양육해내는 헌신성과 열성이 탁월하셨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영적 카리스마도 보유하고 계신 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장공(長空)과 같은 탁월한 인물을 역사의 무대에 발굴하고 끌어내어 일하게 하실 리가 없을 것이다. 마치 저 바울을 역사 무대에 올려 세웠던 바나바처럼 말이다. 또 그렇지 않고서는 신학교에서 제자들의 가슴에 늘 아쉬움을 남긴 위인이 되지도 못하셨을 것이며, 특히 장로교의 분열론(分裂論)을 놓고, 만우 목사님을 그리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학문의 힘, 섬김의 힘, 특히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지도력의 힘이 탁월했음을 말한다. 

 

이런 저의 그 분에 대한 평가가 사실이라면, 그는 성서의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음이 분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신 분이 분명하며,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묶어내려고 헌신한 머릿돌 영성을 가진 분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말하려는 성경의 위인들의 모습을 스승이신 만우께서는 늘 품고 지내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이렇게 만우를 그리스도를 본받은 인물로서의 평가하고, 아브라함을 닮은 분으로서 평가하며,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어른으로서 평가하고 소개드리는 이유는, 오늘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모인 우리가 먼저 또 다른 만우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소명(召命)을 여러분들에게 안겨 드리고자 하는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모임이 결코 그를 머리와 지성으로만 기념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념은 그를 본받아, 우리도 훌륭한 학자들을 양성해내고 탁월한 영성과 지도력을 보유한 인물들을 키워내며, 무엇보다도 우리들 자신이 갈가리 모래알처럼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모퉁이 머릿돌 영성을 가진 통전적 지도자들로 부활(復活)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의 복음과 목회의 현장은 다른 나라와는 아주 다르다. 세계에서 가장 첨단으로 이념 이데올로기가 우리 모든 민족과 나라를 완전 두 쪽으로 갈라서게 한 곳이다. 만우도 그 희생물이셨다. 우리는 지금 그 무엇을 해도, 서로를 제대로 격려하고 평가하며 하나로 묶어내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가슴에 상처가 깊다. 많이 위축되어 있고, 자기표현에 매우 소극적이다. 상대적으로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아주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러기에 이런 반쪽짜리 민족과 국가의 실상 속에서 우리는 세계를 움직일 탁월한 인물들을 생산해내기가 결코 쉽지 않아 진 것이다. 

 

이런 통탄스러운 현상을 외면하는 메시지가 과연 복음적일 수 있을까? 우리의 선교나 증언들은 항상 이 문제에 대항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바로 만우와 장공의 삶이요 정신일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런 현상의 가장 일차적인 피해 지역이자 동시에 가해 영역은 바로 우리 한국 개신교계이다. 세계에서 가장 핵분열로 갈라진 곳이 바로 한국교회이다. 우리 교단도 예외가 아니다. 에큐메니칼 신학을 추종해 왔어도, 우리 역시 내부적으로 서로 하나 되는 일에는 너무도 서툴렀다.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있지만, 우리 안에 내재되어 온 두 흐름과 그룹들, 즉 교회부흥과 성장을 열망하는 이들로 대변되었던 성풍회 그룹들과 JPIC를 중심으로한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했던 종로5가 그룹들의 갈등과 대립은 소위 ‘성령파’라거나 ‘인권파’라는 이름을 가진 제법 굵고 큰 씨름들이었는데-, 지내고 보면, 이 모든 갈등들은 매우 비생산적인 갈등들이었고, 우리를 그 정도밖에 자라게 했던 아쉬운 행태였다. 

 

그런데 매우 묘한 것은, 이들 두 그룹들의 흔적과 배경에는 만우와 장공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만우가 전자에 위치하고 있는 듯하고, 장공이 후자에 위치한 듯하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분명 만우와 장공 두 분 당사자들의 뜻일 리는 없으리라고 믿지만-, 그러나 묘하게도 그의 후배들의 가슴과 입술에는 만우 라인에서는 장공 측을, 장공 라인에서는 만우 측을 아쉬워하는 듯하면서, 서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하고 지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류 보다는 서로 등을 지고 지낸다. 그들의 후예들인 우리가 과연 그래도 되나? 그게 우리를 살리는 일일까, 해체하는 일일까? 다시 생각해야할 시점이다! 

 

나는 이제 이렇게 증언하고 싶다. 만일 만우와 장공을 하나로 묶어내는 신학과 리더십이 우리 안에 견고하였다면, 지금의 우리가 과연 이 정도가 되어 있었을까? 아니다. 우리에게 만일 그런 통전적 지도력이 존재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우리 기장에 의해서 훨씬 더 강하고 성숙한 기독교를 이루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회개해야할 일은 바로 이런 흐름과 물결을 창출하지 못하고, 1/2만을 가지고, 남은 1/2을 견제하고 비판하고 배제하는 일에 우리의 에너지를 너무 소모해 왔다는 점이다. 알고 보면, 상대방이 가진 것이 비 복음적인 것도 아니고, 내가 갖지 못한 나머지 것들이었는데-, 우리는 그만 나에게 없는 상대의 것을 기뻐하거나 공유하려는 데에는 마음을 닫고, 도리어 상대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일에 집중하는 바람에,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셨던 너무도 소중한 ‘큰 하나’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그 바람에 우리는 시너지 효과를 맛보지 못한 체-, 우리 안에 있는 놀라운 역량과 은사를 극대화시키지도 못한 체-, 우리는 각자가 가진 1/2의 모습을 유지하는 일에도 급급한 체 오랜 세월을 지내 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라도 만우와 장공을 통전해서 하나 되게 하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 낼 지도력이 어떻게 만들어낼까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신학 발전과 지도력 개발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낼 마음과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개체에는 강한데 전체에는 너무도 취약하고 개인적이라는 데에 있다. 타 교단 보수집단에 비하여 그래도 열린 신학을 한다는 우리 기장도,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은 한국교회를 더욱 절망하게 하는 일이다. 

 

형님 만우과 동생 장공은 분리된 지체들이 아니다. 저들은 하나였다.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서로를 살아서 돌아가게 한 톱니바퀴들이었다. 그런데 그 후예들이 뒤에서 저 고린도교회 지체들처럼, 나는 바울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자기 취향에 맞는 교역자 중심으로 파벌을 이루고 지내려고 한다면, 그는 반(反)기장인이며 절대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다. 

 

아직도 21세기 한국교회를 살려내려는 의지를 갖는다면, 우리는 절대 새 가슴과 새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 새 마음과 새 가슴은 바로 만우께서 품고 계신 그리스도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제는 우리 후배들이 그가 못 다한 그 지점에 올라서야하지 않겠는가? 그 점을 만우도 바라고 원하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세 본문 내용들은 우리에게 만우의 영적 세계를 함께 공유할 지침이 되리라고 본다. 

 

1) 창13장은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인 롯과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따질 수 있는 민감한 처지에서, 어른으로서 보여 줄 수 있는 관용과 너그러움을 통하여, 우리 선배들의 신앙-, 특히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이 어떤 수준까지 다져져 있어야할 지를 잘 알려주시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은 문제의 해결 열쇠는 후배가 잘 해주는 데에서 찾지 아니하고, 선배의 배려와 모범, 후배에 대한 포용과 양보의 덕성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지금은 한국교회 생태는 강자들의 군림과 약자들의 복종을 질서로 삼고 있는데, 이런 점은 결코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할 수도 없을뿐더러, 인물 생산을 막는 일이다. 

 

2) 마11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하여 뒤늦게 다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던 세례 요한에 대하여, 어떠한 대응을 하셨는지를 잘 말씀해 주신 대목이다. 그 대목은 두 분의 관계의 최대의 위기일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희년 사역에 대한 입장은 분명히 하되,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요한에 대하여서는 최고의 극찬도 밝히시는 따뜻한 메시아적인 품성을 확인하게 되는 곳이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과 다른 이들에 대한 태도가 너무도 경직되어 있는 경향이 있다. 피차 상대방 입장에 대한 비판과 평가는 날카로울 수 있으나, 그럴수록 상대의 인간됨과 장점에 대한 평가에는 훨씬 더 관대하고 따뜻할 수 있어야 우리는 더 큰 하나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세례 요한을 품을 수 있었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3) 엡 2장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선교의 장을 여는 데, 그 선교의 핵심인 마스터 키로 채택한 신학적 논리가 바로, ‘예수는 모퉁이 머릿돌이셨다’라는 것이었음을 확인하는 장이다. 

 

모통이 머릿돌은 바로 서로 다른 대상들을 화해하게 하는 십자가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 대한 이해만이 서로 다른 세계 만민들의 다양한 시선들을 예수께로 집중할 수 있게 하면서, 서로의 공격을 내려놓고 서로를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게 해준 것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민족이 분열되고 교회가 분열되고 사회가 산산조각이 된 처지에서는 우리 교회 선교가 붙들어야할 가장 큰 선교의 핵심논리가 바로 이 대목이라고 보인다. 장공이 제시한 ‘화살촉’이라는 교단의 값진 정체성은 모두의 가슴에 품고, 그러나 서로 다양한 우리를 하나 되어 화살촉의 동력을 행사하려면, 우리는 이 ‘모퉁이 머릿돌’ 영성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분명히 한국교회와 역사의 몸통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숫자의 차원이 아니다. 신학과 의식과 가치와 역할의 싸움에서 이겨내야만 한다. 

 

우리의 싸움은 길고 긴 싸움이다. 갈라진 만우와 장공을 하나로 묶어내야 하는 싸움이다. 이를 위해, 젊은 우리가 먼저 서로 하나 되고, 서로 포용하며, 서로 다르고 차이(差異)나는 일들을 소중히 여기면서, 서로 사랑하며 지혜와 힘과 기도를 모아가자. 이게 오늘 만우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우리 모임의 참 뜻일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나는 매우 고전적인 구호 하나를 던지고 마치겠다.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만우 송창근 목사 기념사업회 정기총회

                                                                                                                                       ( 2018. 2. 19 16:00- 애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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